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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민 서울국제학원장 |
일전에 모 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에서 주최한 세미나에서 '한국에서 30년, 대림동에서 15년'에 대한 주제로 발표한 적이 있다. 이 지면을 빌어 같은 주제 다른 내용으로, 세미나에서 언급하지 못했던 것을 적어본다.
그동안 나는 내 나이를 까맣게 잊고 살았다. 간혹 초면인 사람이 나이를 물어보면 “1971년 생이에요.”라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그는 한참 계산하고 나서 ‘한국 나이로 55세네요’라고 한다. 이어지는 대화는 높임말을 쓰냐 안쓰냐이다.
한국 나이?! 나의 셈법은 다르다. 나의 한국나이는 내가 한국에 온 해부터다. 1995년에 한국에 왔으니 올해 꼭 서른 살인 셈이다.
한국살이 30년!!
희노애락이 영화 필림처럼 스쳐 지난다. 그 속에서 가장 오랜 숙제가 있었다면 바로 정체성 문제이다.
‘나는 한국사람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한국에 와서 십 년 넘도록 이 고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대학교에서 탁석산 교수님의 ‘한국의 정체성’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머리로는 어느 정도 이해되었지만 현실생활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내가 한국인의 동포임을 강조할수록 한국사회는 나를 더욱 배척하는 것 같았다.
한국살이에 지친 나는 며칠동안 중국여행을 떠났다. 호텔 등록을 위해 여권을 꺼냈다. 호텔 직원은 “한국인이시네요”라면 반갑게 맞아주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이다. 한국인, 나는 한국인이다!
호텔에 머무는 동안 나는 수없이 되뇌이었다.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온 후,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한결 가벼워졌고 명쾌해졌다.
2007년, 서울대학교 졸업 논문을 마치고 시간적 여유가 좀 생겼다. 그동안 관심은 있었지만 육아에 학업까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공부하느라 눈만 뜨면 서울에 왔지만 대림동에는 한 번도 와보지 못했다. 드디어 대림동에 올 기회가 생겼다. 귀한동포연합총회에서 한국 국적을 취득하고자 하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귀화시험 대비 교육을 맡게 되었다. 생업이 바쁜 동포들은 평일에는 일하고 주말에 협회 사무실에 와서 귀화 공부를 했다. 이들은 한 번도 배워보지 못한 한국의 역사 인물을 익히고 애국가를 부르며 한국에서 중등교육 수준의 상식들을 익혀갔다. 교육을 받고 귀화시험을 본 합격자가 늘어날수록, 나는 대림동에 오는 횟수가 잦아졌다.
대림동에서 15년
2010년, 오 년째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대림동에 있는 직장으로 옮겼다. 본격적으로 대림동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눈만 뜨면 대림동에 와 있었고 저녁 늦게 퇴근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림동에서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이주동포정책연구소(곽재석 소장)이다. 대림역 10번 출구와 아주 가깝다. 현재는 명지성모병원 건강검진센터로 바뀌었는데 그 건물 3층이 연구소 사무실이었다. 연구소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동포정책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관이었고 나의 연구 분야는 이주 청소년 교육이었다. 특히 동포자녀들의 교육이었는데 초기에는 교육보다 이주 정책에 더 방점을 두고 연구했다. 연구 초창기에는 미성년 동포 자녀들이 한국에서 장기 체류할 수 없었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교육 기회도 거의 없었다. 연구소에서 끈질긴 정책 제안 끝에 드디어 2013년 말부터 미성년 동포 자녀들도 장기체류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동포자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정책지원에 힘입어 2014년도에 어울림 주말 학교가 설립되었다. 어울림주말학교는 동북아평화연대와 재한동포교사협회 그리고 구로도서관이 힘을 모아 시작하였다. 지금까지 구로도서관에서 계속 운영되고 있으며 이는 동포들의 교육 열의가 높음을 알 수 있다. 중국동포들의 자녀에 대한 교육 열의는 주말에만 그치지 않았다. 학교교육은 물론 방과 후 교육에 대한 수요도 컸다. 중국 동포들이 교육 열의에 힘입어 드디어 서울국제학원이 탄생하였다.
서울국제학원 설립 당시 별명은 ‘한국어 응급실’이었다. 내일 당장 한국 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학생이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 쓸 수 없었다. 급한 것부터 해결해야 했다. 자신의 이름을 쓰고 학교 가서 자기를 소개할 수 있는 말부터 가르쳤다. 세종대왕이 말씀하셨듯이 한글은 쉽게 배울 수 있었다. 열흘 지나니 모든 한글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고 1년이 지나니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 교과서 속의 소설을 읽었다. 학생들의 빠른 성장에 서울국제학원의 교육과정도 바뀌었다. 그동안 한국어 단과 수업만 있었는데 국어, 수학, 영어 종합 교육으로 변신하였다.
초창기에는 아이들이 엄마의 손에 끌려 학원에 왔지만 요즘은 달라졌다.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오고 있다. 이런 학생들을 ‘조기유학생’이라고 부른다. 이천 년 전 ‘맹모삼천’에서도 맹모가 교육에 대해 잘 알아서가 아니라 맹자의 공부 열정이 엄마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스마트폰이 발달하고 정보교류가 쉬워지면서 정보가 많아지고 기회도 많아졌다. 중국에서 가까운 한국으로 전학 오는 것이 어찌 보면 하얼빈에서 베이징으로 전학하기보다 더 쉬워졌다.
조기유학생들에게 있어 서울국제학원의 가장 큰 매력은 이중언어 교육일 것이다. 이미 제1 모국어가 형성된 십대들에게 있어 한국의 중고등교육에 이중언어 설명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일선 학교에서는 모든 교과에 이중언어 강의가 불가능하다. 학원을 찾아온 학생들은 학교에서 이해하지 못한 교과 지식을 학원에 와서 이중언어로 설명을 듣는다. 이렇게 공부한 학생들의 성취도는 당연히 높다.
서울국제학원의 또 다른 매력은 엘리트교육에 있다. 이는 학원의 의도적인 교육 방향이기보다 중국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이 모이면서 이루어진 교육 분위기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서울은 평준화 교육이라 일반고등학교에 진학 할 때 중학교 성적이 크게 좌우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기유학 온 학생들은 이미 선발과 탈락이 생활화된 중국의 엘리트교육에 몸이 베여 늘 긴장 속에서 공부한다. 이렇게 꾸준히 한국의 중고등학교를 다닌 학생들은 서울의 명문대학에 진학하게 된다.
대림(大林)동, 서울의 큰 숲에서 서울국제학원을 12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서울의 명문대에 입학한 학생들이 60여 명 된다. 4년 전 서울국제학원을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한 제자가 학원을 다시 찾았다. 후배들을 위해 더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겠다고 한다. 좋은 제안이다. 이참에 이주 교육의 튼튼한 사다리를 만들어 보자. ‘청출어람 청어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를 초월한 제자가 또 후배를 가르치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교육을 만들어 보자. 이 또한 이주자들의 성공적인 정착과 자립의 반증이 아닐까 싶다.
어제 영등포구에서 세계인의 날 행사가 열렸다. 구청장은 표창장을 건네며 따뜻하게 악수를 청했다. 그 악수는 단순한 인사를 넘어, 대림동에서 보낸 15년 대한 인정이며 내일을 향한 약속처럼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