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내 연고가 없는 중국동포들이 귀화 시, 조상의 본(本)을 인정받지 못한 채 ‘구로 김씨’, ‘영등포 김씨’, ‘인천 박씨’, ‘한양 안씨’ 등으로 어처구니 없는 창본(創本)을 해야 하는 현실.
최근 중국 등 재외동포가 한국 국적을 취득(귀화)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본(本)’을 창설하는 현행 가족관계등록제도가 현실과 괴리되어 불필요한 사회적 갈등을 낳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는 가운데 14일 대림도서관 지하 강당에서 이러한 제도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자리를 가졌다.
이번 토론회는 다(多)가치포럼 2025년 제4차 토론회로, 다(多)가치포럼(대표: 김정룡)과 전국동포총연합회(총회장: 김호림)가 공동주최하고 서울시외국인주민센터(센터장: 김동훈)와 재한동포문인협회가 주관, 한중포커스신문(대표·발행인: 문현택), (사)중국동포한마음엽합총회(총회장: 김세광), (사)CK여성위원회(회장: 김예화), 중국동포연합중앙회(회장: 김미정) 등이 후원했다.
이번 토론회는 중국동포 사회의 오랜 숙원이었던 ‘창본(創本)’ 및 ‘계명(改名)’ 관련 제도의 문제점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실질적인 개선방안을 논의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이날 토론회에는 차규근 조국혁신당 국회의원과 이기성 재외동포청 재외동포정책국장, 신한진 서울출입국·외국인청 국적과장, 윤영환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 박경태 성공회대 교수, 최상구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 등이 참석해 큰 관심을 가졌다.
이날 주최측 김호림 전국동포총연합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2025년 제4차 다(多)가치포럼에 함께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드린다”고 말하고 나서 “이번 토론회는 중국동포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오랜 시간 논란이 되어온 ‘창본·계명 제도’의 개선 방향을 함께 논의 하는 뜻깊은 자리인 만큼, 이번 토론회의 내용들이 실질적인 제도 개선으로 이어져 동포 한 분 한 분이 자신의 본과 이름을 당당히 사용하고 동등한 사회 구성원으로 존중받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차규근 조국혁신당 국회의원은 축사를 통해 “이번 다(多)가치포럼의 뜻깊은 자리에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하고 나서 “중국동포들은 한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안고 고국인 한국에 왔는데, 민족의 전통문화이자 개개인 가문의 뿌리문화인 ‘본’을 인정받지 못해 새로운 본을 창본해야 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깝다”면서 “오늘 토론회에서 제기된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검토하여 중국동포분들이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기 위해 적극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기성 재외동포청 재외동포정책국장은 축사를 통해 “중국동포 사회의 오랜 숙원이자 중요한 현안인 ‘창본 및 계명(改名)’ 제도 개선을 위한 공론의 장이 마련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관계자들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린다”고 말하고 나서 “이번 포럼은 중국동포들이 한국 사회에서 겪는 정체성 혼란과 제도적 불합리성을 해소하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를 시작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며 “재외동포청은 재외동포정책 기본법에 따라 국내 체류 동포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중국동포 사회의 특성과 애로사항을 반영한 맞춤형 동포 정책을 수립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리며, 정체성 침해를 야기하는 비합리적인 제도 개선을 위해 여러분들과 함께 힘을 보태겠다”고 말했다.
장문영 재한동포문인협회장은 축사를 통해 “본(本)은 세대를 이어 온 우리의 역사인데도 불구하고 ‘제도’라는 이름 아래 그 뿌리를 잃고, 낮선 본(本)을 ‘창본(創本)’ 하라는 강요받는 현실은 개인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기억까지 흔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오늘 이 토론회가 ‘제도’의 벽을 넘는 첫걸음이 되고, 모든 동포가 권리를 되찾는 전환점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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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럼 발제자와 토론자들. 사진 왼쪽으로부터 - 박연희 이주민센터친구 이사, 최상구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 전춘화 홍익대학교 상경학부 교수, 윤영환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이자 이주민인권센터친구 대표,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다가치포럼 대표). |
전춘화 홍익대학교 상경학부 교수가 좌장을 맡은 이날 포럼은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다가치포럼 대표)이 ‘중국동포의 존엄과 정체성을 침해하는 창본·개명 제도를 페지해야’라는 주제로 발제하고, 윤영환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이주민센터친구 대표)와 최상구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 박연희 이주민센터친구 이사가 토론자로 나섰다.
이날 김정룡 대표는 발제문을 통해, 한국으로 귀화한 중국동포들이 겪는 심각한 ‘본(本) 말살’의 현실과 혈연 정체성 부정 문제를 공론화하며 제도 개선을 촉구하고 나섰다.
김 대표는 특히 한국의 전통문화인 ‘본’에 대한 인식이 귀화 동포들에게는 오히려 배타적인 법적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중국 조선족은 대대로 이어져 온 조상의 성씨와 이름을 보존하고 있으며, 이는 한국 정부와 학계 모두가 인정하는 한국의 전통문화임에도 불구하고 동포들이 귀화 후 일상생활에서 같은 성씨를 가진 사람을 만나더라도, 혈연관계와 항렬 관계를 명확히 알 수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가족법원에서 발생한다. 김 대표는 ‘같은 본’을 가진 후손이 ‘다른 본’을 갖게 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언급하며, “한국 가정법원이 사실상 중국동포 출신 귀화자들이 가문을 포기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면서 “이는 귀화 동포들의 ‘본’을 말살하는 제도로 얼마나 슬픈 현실인가?”라며 개탄했다.
이는 정부가 말로만 통합을 외칠 뿐, 귀화 동포들의 가장 근본적인 정체성인 혈연 관계와 가문 문화를 제도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김정룡 대표는 한국 정부를 향한 요구사항을 간결하게 정리했다. 그는 “우리는 대한민국 정부에 무엇을 새롭게 해달라고 바라지 않는다. 다만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해 달라.”
이는 귀화 동포들이 한국의 일원이 되면서도, 그들이 대대로 지켜온 본래의 혈통과 가문 문화를 그대로 유지하고 인정받을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해야 함을 호소하는 강력한 메시지로 풀이된다.
법조계에서도 이와 관련해 제도개선이 제기되고 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이자 이주민인권센터친구 대표인 윤영헌 변호사는 ‘창본·개명’ 제도와 관련해 “현행 제도가 귀화 동포의 특수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면서 당사자의 의사를 최우선으로 고려한 제도 개선을 촉구했다.
현행 법원은 귀화 동포에게 과거 사용했던 성과 본을 인정받기 위해 높은 수준의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윤 변호사는 “3~4대에 걸쳐 해외에 거주하며 가족관계 관련 증명서를 확보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인우보증 등 간접적인 방법을 써야 하는 상황은 제도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귀화 동포들은 원하는 성과 본을 사용하지 못하고, 이는 개인적인 불이익과 정서적 모멸감으로 이어져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윤 변호사는 “특히 중국동포의 경우, 한국인과 동일하게 성과 본을 사용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은 이들에게 새로운 성과 본을 창설하도록 요구하여 중국에서 사용하던 성과 본을 그대로 쓰고자 하는 이들의 의사를 막고 있다”며 “특별한 사회적, 법적 기능이 없다면 재외동포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당사자의 진술과 의사에 따라 ‘본’을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강조했다.
윤 변호사는 “현행 제도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라며, “재외동포의 인권과 사회 통합을 위해 당사자의 의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법과 제도를 시급히 정비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두 번째 토론자로 나선 최상구 KIN(지구촌동포연대) 대표는 “해외 동포, 특히 중국·소련 지역 동포들의 대한민국 국적 취득 과정에서 ‘성(姓)과 본(本)’ 문제가 오랜 문제로 지적되어 왔으며, 이를 해소하기 위한 법 개정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 중”이라며 “동포들이 국적취득 시 성본과 이름, 동포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 번째 토론자로 나선 이주민센터친구 박연희 이사. 그는 국적취득 후 창본·개명 과정에서 자신이 겪었던 과정을 고백해 주목을 받았다.
박 이사는 2024년 8월, 깊은 고민 끝에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 그러나 국적취득 후 주민등록에 중국어 이름이 자동으로 병기되지 않는 문제에 직면했다. 금융 및 통신사 등 실생활에서 중국어 이름이 필요한 경우가 많았으나, 병기 의무가 없었기에 중국어 이름을 주민등록에 올리려면 개명 절차를 거쳐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중국어 이름은 개명했으나, 더 큰 문제는 본관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박 이사는 본래 밀양 박씨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밀양 박씨임을 증명할 길이 없어 결국, 인천(仁川) 박씨로 새롭게 태어나게 되었다.
박 이사는 한국에 사는 친인척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을 때, “그럼 앞으로 인천 박씨로 신청해야 하냐”는 질문을 받자 큰 혼란을 느꼈다고 한다. 이는 단순히 이름이나 본관의 변경이 아니라, 자신과 가문의 역사적 뿌리를 재조명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중대한 과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박 이사는 “우리가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는다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늘 강조해 왔다. 그는 “본인의 본관이 다시 ‘밀양 박씨’로 바뀌는 그날을 기대한다”며 토론을 마무리했다.
한편 이날 토론회는 많은 동포들이 큰 관심을 같고 대거 참석하여 열띤 토론과 제안들을 내놓았다.
<문현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