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류송미 작가 |
삶은 흔들리는 꽃이다. 흔들리며 향기를 풍기는 꽃이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면 꽃은 더욱 단단한 결을 드러내며 자신의 운명과 마주 선다. 그 연약한 꽃잎 속에도 꺾이지 않는 결기가 숨어 있듯 나의 삶 또한 수없이 흔들리며 오늘에 이르렀다.
내 인생의 봄날은 그리 길지 않은 것 같다. 환하게 웃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언제나 짧았고 그 뒤에는 늘 예상치 못한 비바람이 따라왔다. 사람을 믿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던 나, 그 믿음 때문에 가장 큰 상처를 입기도 했다.
한 번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지인을 돕기 위해 적지 않은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그는 마른 얼굴에 늘 미안한 웃음을 띠고 있었고 손등의 핏줄이 드러날 만큼 거칠어진 삶의 흔적이 내 마음을 흔들었다.
“조금만 도와주면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라는 그의 말에 나는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돕는 일이 곧 나 자신을 지키는 일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약속했던 날짜가 지나고 다시 그다음 계절이 지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연락은 끊겼고 남은 것은 텅 빈 통장과 무너져 내리는 일상의 균형뿐이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생각보다 깊었고 나는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야 했다.
식탁 위 반찬이 점점 줄어들고 밤이 되면 숨이 막히듯 답답해졌다. 거울 속에서조차 낯선 내 눈가에는 깊은 주름이 패였고 입가에는 웃음 대신 침묵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사건 이후로 사람을 향한 마음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인생은 한 번의 시련으로 끝나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억울한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함께 일하던 자리에서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 책임을 떠안게 된 것이다. 사실을 말해도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믿고 지내던 사람들조차 등을 돌렸고 나는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억울함은 분노로 바뀌었고 분노는 다시 깊은 무력감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마치 비바람에 꺾인 꽃과 같이 뿌리는 뽑히지 않았지만 더 이상 향기를 낼 힘조차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았다. 마음 한켠에 아주 작은 불씨 같은 것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거창한 희망이라기보다는 그저 “이대로 끝낼 수는 없다”는 조용한 의지였다.
나는 다시 일어섰다. 거창한 결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하루를 버티고 또 하루를 살아내며 스스로를 놓지 않으려 애썼다.
새벽마다 창문을 열고 들어오는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직 내가 살아 있음을 거듭 확인하며 용기와 신심을 키웠다. 손에 잡히는 작은 일부터 다시 시작했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내 자리를 지켜갔다.
시간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바꾸어 놓는 고마운 존재인가본다. 억울함도 분노도 서서히 옅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조금 더 단단해진 나의 당찬 모습이었다.
이전의 나는 사람을 믿었지만 이제금 나는 사람을 이해하려 한다. 이전의 나는 상처에 무너졌지만, 현재의 나는 상처 위에 조용히 서 있는 것을 배웠다.
지금의 나는 아직도 때로는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 삶의 바람은 여전히 거칠고, 예고 없이 몰아친다. 그러나 나는 흔들리는 것이 곧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그 속에서 향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깊이 깨닫고 있다.
꽃은 바람을 피하지 않는다. 바람 속에서 더 깊은 향을 품는다.
사기와 억울함, 가난과 고독 속에서도 나는 나를 놓지 않고 끝내 내 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이 내가 지켜온 지조이며 내가 끝내 잃지 않은 나의 향기였다.
삶의 모든 순간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흔들림 속에서 피어난 꽃처럼 나도 조금씩 성장하며 나만의 향기를 세상에 조용히 풍겨갈 것이다. 비록 그 향기가 크지 않을지라도 그것은 내가 견뎌온 시간의 증거이며 마침내는 꺾이지 않은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